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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하셨던 날 - 내가 유소년 축구를 그만둔 이유

by 스포츠리서치 2026. 2. 25.

대한축구협회는 2002년 월드컵 이후 20년 넘게 매년 250억 원 이상을 유소년 육성에 투자했습니다. 총 5,000억 원이 넘는 금액입니다.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놀랐습니다. 근데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이 투자되는데, 왜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돈 때문에 축구를 그만뒀을까요.

 

대한축구협회 마스코트 백호
대한축구협회 마스코트 백호

5,000억 투자의 그림자, 경제적 부담으로 사라지는 재능들

대한축구협회의 유소년 투자 규모는 정말 대단합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수익금의 60%를 유소년 육성에 썼고, 그 금액만 1,000억 원에 육박했습니다. 이후로도 매년 전체 예산의 4분의 1 정도인 250억에서 300억 원을 꾸준히 투자해왔습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기술적 노하우를 배워왔고, 독일과 잉글랜드에서는 행정 구조를 벤치마킹했습니다. 골든에이지, 퓨처팀, 스몰사이드 게임 같은 체계적인 프로그램도 도입했습니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한국 축구의 유소년 선수층이 두꺼워진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실제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축구부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인조 잔디 축구장도 많이 생겼습니다. 유럽에서 활약하는 한국 선수들도 점점 많아지면서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겪어본 유소년 축구 현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거의 7년 가까이 축구를 했는데, 그동안 들어간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매달 나가는 훈련비, 축구화나 유니폼 같은 장비 구입비, 원정 경기 갈 때마다 드는 교통비와 숙박비, 각종 대회 참가비까지. 이게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몇 년씩 쌓이다 보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정말 큰 부담이었을 겁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더 이상 지원해주기 힘들 것 같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사실 미안해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셨으니까요. 근데 그 순간 든 생각은 이거였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조금만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렸으면 달라졌을까.

협회 차원에서 5,000억 원이 넘는 돈이 투자됐다는데, 정작 현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개개인한테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는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골든에이지 프로그램이나 퓨처팀 같은 시스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런 시스템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니까 동네 축구부에서 매일 훈련하면서 꿈을 키워가는 단계에서 이미 경제적 이유로 그만두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저처럼요.

실력이 아니라 돈 때문에 포기하는 아이들, 놓친 재능은 누가 책임지나

유소년 축구를 그만두는 이유가 항상 실력 부족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잘하는 선수한테 밀렸거나, 부상을 당했거나, 재능의 한계를 느꼈거나.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근데 제 경험상 그것만큼이나 많은 이유가 바로 집안 형편입니다. 이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조용히 그만두니까요.

저는 실력이 없어서 그만둔 게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레귤러로 뛰었고, 중학교 들어가서도 주전이었습니다. 코치님도 고등학교 가서도 계속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저는 제가 못해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 돈 때문에 그만둔다는 게 억울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만두고 나서 한동안은 축구를 보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TV에서 경기가 나와도 채널을 돌렸습니다. 친구들이 축구하자고 해도 핑계를 대고 안 나갔습니다. 대신 피파온라인4를 미친 듯이 했습니다. 직접 뛸 수는 없으니까 게임으로라도 축구를 이어가고 싶었던 거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제 나름대로 축구를 놓지 않으려는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벤치마킹해온 시스템들을 보면 정말 체계적입니다. 브라질처럼 지역별로 우수 자원을 선발하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독일처럼 366개의 지역 센터를 운영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시스템은 분명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근데 그 시스템에 들어가기 전 단계, 그러니까 동네 축구부에서 매일 훈련받으면서 꿈을 키워가는 단계에서 경제적 이유로 탈락하는 아이들을 위한 지원은 충분한지 의문입니다.

퓨처팀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났어도 상반기 출생과 하반기 출생의 신체 차이 때문에 기회를 못 얻는 아이들한테 균등한 기회를 주기 위한 시스템입니다. 이런 제도가 생긴 건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근데 신체적 성장 속도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것만큼이나, 경제적 이유로 아예 시스템 밖으로 밀려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지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제가 계속했으면 어디까지 갔을까. 프로까지 갔을까, 아니면 고등학교에서 벤치 신세를 졌을까. 정답은 모릅니다. 근데 그 질문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남FC 경기를 찾아가고, 축구 유튜브를 보고, 피파온라인4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축구는 여전히 제 삶의 일부니까요.

돈 때문에 축구를 그만둔 아이들 중에 정말 재능 있는 선수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놓친 건 한국 축구 전체의 손실입니다. 5,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게 단순히 시스템과 시설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하고 싶은 아이가 경제적 이유로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까지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소년 축구는 프로 선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한 아이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 꿈이 돈 때문에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게 진짜 유소년 육성이 아닐까요. 재능과 의지가 있는 아이가 끝까지 해볼 수 있는 환경. 그게 갖춰질 때 한국 축구도 진짜로 더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8C%80%ED%95%9C%EC%B6%95%EA%B5%AC%ED%98%91%ED%9A%8C#s-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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