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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일화천마 처음 직관 갔던 날

by 스포츠리서치 2026. 3. 5.

K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기록한 클럽이 왜 2부 리그로 강등됐을까요? 성남일화천마는 7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명문구단이었습니다. 하지만 2016년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며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되는 충격을 겪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성남일화천마 경기를 직관했는데, 그때만 해도 이 팀이 강등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성남일화천마 트레이드 마크
성남일화천마 트레이드 마크

창단부터 시작된 심판과의 전쟁

1989년 3월 18일, 통일그룹 주도로 서울 강북을 연고지로 창단한 일화천마는 첫 시즌부터 화제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좋은 쪽만은 아니었습니다. 박종환 감독은 창단 첫 시즌부터 심판 판정에 강하게 항의하며 징계를 받았고, 이는 '심판과의 전쟁'이라는 별명을 낳았습니다.

1989년 5월 13일 유공 코끼리와의 경기에서 득점 번복 판정에 15분간 항의했고, 8월 15일에는 경기 후 관중 3~4천 명이 경기장에 난입해 심판을 폭행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관중 난입'이란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은 관중이 경기장 펜스를 넘어 필드로 들어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당시 한국프로축구는 관중 통제 시스템이 체계화되지 않았고, 이런 사태가 여러 차례 발생했습니다.

제 기억 속 성남일화천마 경기장은 열정적이었지만, 동시에 통제가 어려운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관중석에서 심판에게 야유를 보내는 건 흔한 일이었고, 판정이 불리하면 분위기가 험악해지곤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저러다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한축구협회는 박종환 감독에게 여러 차례 징계를 내렸지만, 항의는 계속됐습니다. 1990년 4월에는 문원근 선수가 심판을 폭행해 무기한 출장정지를 받았고, 1992년 7월에는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판정에 불복해 팀 전원이 퇴장하며 0-2 몰수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클럽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지만, 역설적으로 '강한 팀'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

황금기, 3연패와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1992년 아디다스컵 우승을 시작으로 일화천마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K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특히 1993년 시즌은 12승 11무 4패 64승점으로 2위 LG 치타스와 14점 차이로 우승을 확정지었습니다. 여기서 승점제란 승리 시 일정 점수를 부여하고 최종 합산 점수로 순위를 정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당시 K리그는 정규시간 승리 시 승점 3점, 무승부 후 승부차기 승리 시 1.5점을 부여했습니다.

1994년과 1995년에도 우승을 차지하며 K리그 역사상 첫 3연패 구단이 됐고, 1995년 12월 29일에는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당시 일화천마의 전술적 특징은 '실리축구'였습니다. 과거 '벌떼축구'로 불리던 다득점 다실점 스타일에서 벗어나, 실점을 최소화하고 조직력으로 승부하는 방식으로 전환했습니다.

저는 1994년 시즌 홈 경기를 두 번 직관했는데, 수비 라인이 정말 탄탄했습니다. 상대 공격수가 페널티 박스 안까지 들어오는 걸 거의 허용하지 않았고, 역습 상황에서만 집중적으로 골을 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TV로 보는 것과 달리 현장에서는 수비수들이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라인을 조율하는 게 보였고, 그게 조직력의 핵심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특히 발레리 사리체프 골키퍼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일화천마를 지켰던 그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답게 승부차기에서 여러 차례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골대 앞에서 그의 체구는 실제로 봐도 거대했고, 상대 팀 선수들이 슈팅하기 전에 이미 기가 죽어 보일 정도였습니다.

천안 이전과 슬럼프, 그리고 성남 정착

1996년 프로축구 완전연고제 시행으로 일화천마는 서울을 떠나 천안으로 이전했습니다. 천안시는 천안오룡경기장을 축구전용구장으로 개조하고 종합 스포츠센터를 신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 시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축구전용구장이란 육상 트랙 없이 관중석이 필드에 바로 인접한 구장을 의미합니다. 관중과의 거리가 가까워 몰입감이 높고 홈 어드밴티지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안오룡경기장은 조명 시설조차 없었습니다. 1998년 8월 22일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는 일몰로 인해 승부차기 도중 시야 확보가 불가능해지자, 주심이 추첨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팀은 1998년과 1999년 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솔직히 이 시기 천안일화는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과거 3연패를 달성했던 팀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경기력이 무너졌고, 주축 선수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전력 공백이 심각했습니다. K리그 외국인 골키퍼 제한 조치로 사리체프의 출전 기회도 줄어들었고, 팀 전체가 방향을 잃은 듯 보였습니다.

1999년 FA컵 우승으로 숨통을 틔운 일화천마는 2000년 성남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재기를 노렸습니다. 성남시는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올림픽 대표 출신 김대의, 김현수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재정비했습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다시 3연패를 달성하며 왕조를 부활시켰고, 2010년에는 AFC 챔피언스리그 개편 이후 첫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성남 정착 이후 제가 직관한 경기들은 천안 시절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경기장 시설도 좋아졌고, 관중 분위기도 훨씬 조직적이고 열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2010년 ACL 우승 당시 홈 경기 분위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사샤 오그네노브스키가 결승골을 넣었을 때 경기장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고, 그 순간만큼은 과거 황금기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시민구단 전환과 강등의 충격

2012년 9월 구단주 문선명이 사망한 후 일화는 구단 운영비를 3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삭감했습니다. 해체 위기에 몰린 성남일화는 2013년 10월 성남시가 인수하며 시민구단으로 전환됐고, 구단명도 성남FC로 변경됐습니다. 여기서 시민구단이란 지방자치단체나 시민이 출자해 운영하는 구단을 의미합니다. 기업구단과 달리 공공성을 강조하고 지역 밀착형 운영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재정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011년 시즌 이후 정성룡, 최성국, 조병국 등 주전급 선수들이 대거 이탈했고, 신규 영입은 최소화됐습니다. 2014년 박종환 감독이 선수 폭행 사건으로 사퇴한 후 감독이 세 차례나 바뀌는 등 팀 내부가 혼란스러웠습니다. FA컵 우승으로 간신히 1부 리그에 잔류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2016년 시즌, 성남은 총체적 난국에 빠졌습니다. 주축 공격수 티아고가 이적하고 주전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당하면서 8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했고, 김학범 감독마저 사임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리그 11위로 추락한 성남은 강원FC와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렀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밀려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됐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성남 경기를 직관한 건 2016년 강등 직전 홈 경기였습니다. 경기장 분위기는 처참했습니다. 서포터즈 일부가 '위대한 성남은 죽었다'는 피켓을 들었고, 경기 후 골키퍼와 관중이 언쟁을 벌이는 모습까지 목격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봤던 그 거대하고 강했던 팀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성남일화천마의 역사는 한국 프로축구의 흥망성쇠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창단 초기 심판 판정 시비로 얼룩졌지만, 조직력과 실리 축구로 K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재정난과 연고지 이전, 주축 선수 이탈이 반복되며 결국 강등이라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좋은 경기는 좋은 구장과 안정적인 재정에서 나옵니다. 시민구단으로 재출발한 성남FC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장기적인 투자와 체계적인 유소년 시스템 구축이 필요합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B%82%A8_FC%EC%9D%98_%EC%97%AD%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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